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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저는 치매가 남의 일인 줄 알았습니다. 결혼하고 홀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20년을 아무 탈 없이 잘 지냈으니까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물건을 어디 뒀는지 자꾸 잊으셨고, 그러다 갑자기 욕을 하시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 사실 자체를 기억 못 하셨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치매가 우리 가족 이야기가 됐습니다.
치매가 우리 집에 들어온 날
병원에서 5급 진단을 받고 나서 저희 부부는 밤새 의논했습니다. 아들은 주간보호센터를 알아봤지만, 어머니께 말씀드리면 왜 거기를 가야 하냐고 밤새 무한 반복으로 물으셨습니다. 설득이 안 됐습니다. 결국 저희는 집에서 직접 돌봄을 하기로 하고, 하루 3시간 저녁 방문 돌봄 서비스만 신청했습니다.
그 시절 제가 찾아본 자료들에는 공통적인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운동이 좋다, 글쓰기나 독서가 도움이 된다, 사람들과 어울려야 한다. 맞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거기서 한 가지가 빠져 있다고 느꼈습니다. 바로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가족의 역할이었습니다.
경도인지장애(MCI, Mild Cognitive Impairment)라는 진단명이 있습니다. 여기서 경도인지장애란 정상적인 노화와 치매 사이의 중간 단계로, 기억력이나 판단력이 또래보다 떨어지지만 아직 일상생활은 유지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저희 어머니가 딱 그 경계에 계셨습니다. 이 단계에서 어떻게 하느냐가 이후 5년, 10년을 가릅니다.
치매를 늦춘 것들, 직접 겪어보니
저는 주간보호센터를 여러 곳 알아봤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얌전한 치매, 즉 신체 활동이 가능하고 돌봄이 어렵지 않은 분들만 받아주는 곳이 많았습니다. 치매 초기라도 행동 증상이 있으면 입소 자체가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저희 부부 결론은 하나였습니다. 우리가 더 신경을 써보자.
저와 남편은 쉬는 날이 달랐습니다. 그래서 각자 쉬는 날이면 어머니를 모시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거창한 여행이 아니었습니다. 꽃을 보여드리고, 나무 옆에서 잠깐 앉아 쉬고, 같이 밥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제가 직접 겪어보니 이 소소한 외출이 어머니 표정을 바꿨습니다.
신경과 전문의들이 강조하는 인지예비능(Cognitive Reserve)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인지예비능이란 뇌세포가 손상되더라도 그동안 쌓아온 경험과 자극 덕분에 뇌가 손상을 버텨내는 능력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뇌의 '여유 용량' 같은 것입니다. 평소 사회적 교류와 신체 활동이 이 예비능을 높여준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저희가 어머니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바로 그 역할을 한 셈이었습니다.
치매 판정을 받고 2년쯤 지나자 변화가 생겼습니다. 욕이 사라졌습니다. 깜빡하는 것은 여전히 있었지만, 평소 생활 자체는 거의 예전과 같아졌습니다. 의학적으로 치매 진단을 받았는데 증상이 나아진 것입니다. 저는 이게 운이 아니라 그 2년 동안의 노력 덕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치매 진행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끊임없는 신체 활동과 가사 참여 (설거지, 텃밭 가꾸기 등 소소한 일상 포함)
- 새로운 것을 배우려는 도전 의지 (악기, 글쓰기, 그림, 운동 등)
- 가족과 사회적 유대를 통한 정서적 안정
- 금주, 금연과 꾸준한 유산소 운동
- 좋은 면을 먼저 보는 긍정적 사고 습관
국내 65세 이상 노인의 치매 유병률은 약 10%로, 2023년 기준 약 98만 명이 치매를 앓고 있는 것으로 추산됩니다(출처: 중앙치매센터). 이 숫자가 계속 늘고 있다는 게 남의 이야기가 아닌 이유입니다.
가족이 할 수 있는 것, 그 현실적인 이야기
일반적으로 치매 예방은 개인의 생활 습관 문제로만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 겪어보니 가족의 움직임 없이는 그 생활 습관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습니다. 어머니 혼자서 꽃을 보러 나가실 수 없었고, 혼자서 사람들과 어울리러 나가실 수도 없었습니다. 그 첫걸음을 만들어드리는 것이 저희 부부 역할이었습니다.
뇌신경가소성(Neuroplasticity)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뇌신경가소성이란 뇌가 새로운 자극과 경험에 의해 신경 연결망을 재구성하고 스스로 회복하는 능력을 뜻합니다. 치매 환자도 적절한 자극이 주어지면 이 능력이 작동한다는 연구 결과들이 나와 있습니다. 어머니가 꽃을 보고, 낯선 길을 걷고, 저희와 밥을 먹으며 웃으셨던 그 순간들이 뇌 입장에서는 새로운 자극이었던 겁니다.
물론 가족이 모든 것을 할 수 없습니다. 저도 일을 하고 있었고, 남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만큼 했습니다. 어떤 날은 너무 지쳐서 나가기 싫었던 것도 솔직히 사실입니다. 그래도 나간 날이 더 많았고, 그 선택들이 쌓였습니다. 치매를 막을 수는 없었지만, 우리는 분명히 늦출 수 있었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19년 발표한 치매 예방 가이드라인에서 신체 활동, 금주, 금연, 사회적 교류를 치매 위험을 낮추는 핵심 요소로 제시했습니다(출처: 세계보건기구 WHO). 저희 가족이 했던 일들이 결국 그 방향과 같았다는 걸, 나중에 자료를 찾아보고서야 알았습니다.
치매는 막을 수 없는 병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늦출 수 있다는 건 제 경험으로 확신합니다. 치매를 앓고 있는 가족이 있다면, 큰 것을 해드리려 하기보다 오늘 같이 밥 한 끼 드시는 것부터 시작해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그 한 끼가 생각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합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을 공유한 것이며, 전문적인 의료 조언이 아닙니다. 치매가 의심되시면 반드시 신경과 전문의와 상담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