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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고 시어머니와 같이 살겠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이 말렸습니다. 근데 저는 오히려 기대가 됐습니다. 16살부터 부모님과 떨어져 살아서 늘 엄마가 그리웠거든요. 그 그리움을 시어머니한테서 채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결과적으로 그 선택이 제 결혼 생활에서 가장 잘한 일 중 하나였는데, 동시에 가장 많이 배운 일이기도 했습니다.
고부관계에서 역할 경계가 필요한 이유
저도 처음엔 막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잘해 드리면 되지, 좋아하면 되지. 그런데 같이 살다 보니 친밀감(親密感)과 적정 거리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게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습니다. 여기서 친밀감이란 단순히 사이가 좋다는 것을 넘어, 서로의 감정과 생활 방식을 어느 정도까지 공유할 것인지에 대한 암묵적 합의를 의미합니다. 이게 맞지 않으면 아무리 좋아해도 삐걱거리게 됩니다.
제가 직접 겪어보니 가장 효과적이었던 방법은 역할 분담(役割 分擔)을 명확히 하는 것이었습니다. 역할 분담이란 가사와 육아, 경제활동 등의 책임을 서로 조율하여 한쪽에 과부하가 쏠리지 않도록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예를 들어서 저희는 맞벌이였기 때문에 시어머니께서 살림을 주로 맡아 주셨고, 저는 빨래를 돌리는 일을 했습니다. 빨래를 걷으면 시어머니가 개어 두셨고, 저는 가져다 정리했습니다. 누가 정한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서로의 영역이 생겼고, 그게 갈등을 줄이는 데 크게 도움이 됐습니다.
고부 갈등은 생각보다 흔한 문제입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기혼 여성 중 고부 관계에서 스트레스를 경험한 비율이 상당히 높으며, 그 원인의 상당 부분은 역할 기대의 불일치에서 비롯된다고 분석합니다(출처: 한국여성정책연구원). 한쪽은 '며느리니까 당연히 해야지'라고 생각하고, 다른 한쪽은 '이건 내가 할 일이 아닌데'라고 느끼는 그 간극이 쌓이면 관계가 무너집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커뮤니케이션 채널(communication channel), 즉 갈등 상황에서 의사를 전달하는 경로입니다. 저희 시어머니는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으면 저한테 직접 말씀하시는 대신 남편을 통해 조심스럽게 전달하셨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왜 돌아가지?'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현명한 방식이었습니다. 직접 충돌하지 않으니 감정이 덜 상했고, 남편이 중간에서 완충 역할을 하니 관계가 훨씬 부드럽게 유지됐습니다.
고부 관계에서 건강한 경계를 만들기 위해 제가 직접 효과를 본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가사의 역할 분담을 초기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도록 유도하기
- 갈등 발생 시 배우자를 커뮤니케이션 채널로 활용하기
- 며느리 먼저 손을 내밀어 거리를 좁히는 시도 해보기 (저는 목욕탕 동행을 제안했습니다)
- 서로의 생활 방식을 강요하지 않고 관찰하는 시간 갖기
딸 같은 며느리라는 말의 진짜 의미
저는 시어머니를 엄마라고 불렀습니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부러워하셨고, 저도 그게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시어머니와 맥주를 한 잔 하다가 이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딸 같은 며느리, 엄마 같은 시어머니, 이건 그냥 말이다. 며느리가 진짜 딸이 될 수 없고, 시어머니도 진짜 엄마가 될 수 없다. 서로 적정선에서 타협하고, 힘들 때 위로해 주고, 기쁠 때 같이 기뻐해 주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거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오히려 며느리인 저보다 시어머니가 먼저 그 선을 정의해 주신 겁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으면서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딸처럼 대해야 한다'는 압박이 사라지고, '더불어 잘 지내면 된다'는 가벼움이 생겼거든요.
심리학에서 이야기하는 정서적 경계(emotional boundary)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정서적 경계란 타인의 감정과 나의 감정을 구분하고, 관계에서 어디까지를 내 책임으로 볼 것인지 스스로 인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부 관계에서 이 경계가 무너지면, 시어머니의 기분이 며느리 탓이 되고 며느리의 선택이 시어머니의 감정을 건드리는 상황이 반복됩니다. 반대로 경계가 너무 딱딱하면 남남처럼 지내게 되죠. 시어머니의 그 말씀은 사실 정서적 경계를 아주 자연스럽게 설정해 주신 겁니다.
한 가지 더 이야기하고 싶은 건 남편과 싸울 때 시어머니가 항상 제 편을 들어주셨다는 겁니다. 일반적으로 시어머니는 아들 편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이는 관계의 질에 따라 크게 달라집니다. 물론 혈연 관계가 아닌 이상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순간 결국 본인 자식 편이 될 수밖에 없는 것도 현실입니다. 이건 나쁜 게 아니라 그냥 인간의 본능에 가깝습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국내 3세대 이상 동거 가구 비율은 꾸준히 감소하는 추세이지만, 고부 갈등은 여전히 가족 갈등의 주요 원인으로 꼽힙니다(출처: 통계청). 구조가 바뀌어도 관계의 본질은 바뀌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남편과의 갈등을 시어머니에게 풀지 않는 것, 시어머니에 대한 불만을 남편과만 공유하는 것, 이 두 가지만 지켜도 고부 관계는 훨씬 수월해집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틀리지 않기 때문에, 그 자연스러운 기울기를 억지로 바꾸려 하기보다는 그 기울기가 작동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만드는 편이 낫습니다.
결국 고부 관계의 핵심은 기대치 조율이라고 생각합니다. '며느리니까 당연히 해야 한다'는 생각을 양쪽 모두 조금씩 내려놓을 때, 서로 한 발씩만 다가가면 훨씬 가볍고 오래가는 관계가 됩니다. 저는 시어머니와 살면서 싸운 적도 있고 서운한 날도 있었지만, 돌이켜보면 그 시간이 제 인생에서 꽤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딸 같은 며느리가 되려고 애쓰기보다, 서로 편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던 것이 더 잘한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참고: 딸 같은 며느리지만 싸울 땐 아들 편? | 말자쇼 EP.26 | KBS 260706 방송